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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르신의 회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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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0-12-15 08:54 조회1,51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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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많이 추워진 요즘, 마음이 따듯해지는 사연을 전해드립니다.

며칠동안 고뇌하며 열심히 무언가를 쓰시는 아버님의 모습을 엿보다
조심스레 여쭤보니 본인의 삶의 일부를 적은 회고록이였습니다.
몇 번이고 추억을 되새기며 읽는 모습에 저 또한 숙연해졌습니다.
문득 어르신들의 다양한 삶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가볍게만 느껴졌던 하루하루가 모든 추억을 감싼 무거운 보따리로 바뀌었을 때, 아직 경험해보지 못한 저로써는 그 추억이 얼마나 큰지 짐작되지 않습니다.

이곳에 어르신의 회고록을 옮겨봅니다.
“ 우리집 가정의 모범사례를 여러 할아버지, 할머니께 전하고 싶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우리 할아버지는 고흥 유씨 집안 시조인 유영할아버지 30대손으로 7형제 중 다섯째인 유영의 이름으로 태어난 할아버지였으며 할아버지의 부인은 의령 남씨 집안에 어여뿐 규녀로 태어나 할아버지와 결혼하시여 시부모님 모시고 효도하면서 가정을 이루고 살아오시다 외아들 유일규란 젖먹이 아들을 두고서 남편을 저 세상에 보내시고 29세의 청춘나이에 젖먹이 아이와 둘이서 살아오면서 갖은 고통 다 견디면서 슬픔을 견디고 살아오신 할머니의 은혜야 말로 훌륭하신 할머니임을 자부합니다.
어려운 살림에도 낮이면 들에 나가 날품팔이 하시고 밤이면 길삼살아 어려운 가정을 화평한 가정으로 이룩한 할머니에게 나라에서 주는 효녀상을 외정때 도지사로부터 표창을 받았으며 젖먹이 아들을 잘 키워 아들인 외아들 유일규씨를 한양 조씨인 아가씨와 결혼시키며 화목한 가정을 이루고 살면서 아들 며느리로부터 효도를 받으면서 살아왔다. 온 동네에서 아들인 유일규와 며느리 남씨는 효부, 효자로 이름났으며 법 없이도 살아가는 삶이라고 칭손을 받았으며 동네일이라면 좋은 일, 궂은 일 가리지 않으시어 동네 지도자로 살아왔으나 아들 며느리 사이에 자손이 없어 할머니께서 걱정하시다가 칠성당에 절하면서 빌고 삼신당에 정화수 물을 아침, 저녁으로 떠놓으시고 빌고 빌어서 얻은 손자가 바로 유종구이다.
절하시고 빌어서 얻은 손자 유종구라 할머니께서 금이야 옥이야 아끼면서 귀중히 키워 남들은 학교에 보내지 않는 시절에 할머니께서는 없는 살림에도 교육에 대해 열의가 많으시어 빚을 얻어서라도 학교에 보내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보내였다.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 학교에 갔다 오면 지게지고 산에 올라가 나무하다가 집에 불 때어 밥해먹고 방도 따뜻하게 하였으며 장날이면 나무지게 다 짊어지고 장날에 나가 팔아서 명태 한 마리, 갈치 한 마리 사서 지게에다 매달고 집에 돌아와 온 식구가 밥을 먹었던 것이 생각난다.
고등학교 졸업하고서 그 이튿날 교복입고 모자 쓴 채로 집에다 말도 하지 않고서 집에 있으면 나무나 하고 일이나 하면서 살아야하기에 서울행 완행열차를 타고 고향을 떠나 서울로 도망쳤다.
서울역에 도착하여 오고 갈곳이 없어 헤매다가 공사하는 곳을 찾아가 일해주고 밥얻어 먹으면서 노동일, 건축일, 공장 생활, 험한 생활 모든 것 안 해본일 없이 다해보았다.
그러나 살길이 망막하여 점원생활을 하다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을 하여 가방을 하나 사가지고 점원 생활하던 가게에서 사장님께 말씀드리고 장사를 하겠다고 물건을 좀 달라고 하여 비누, 치약, 칫솔 생활필수품을 가방에 넣어가지고 무거운 가방 들고서 고학생 노릇을 하였다.
어느날 평화시장에 구경삼아 다니다가 어느 헌 옷파는 가게에서 서울대생 교복이 걸려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하여 그 교복을 사가지고 입고 그 이튿날부터 서울대 가짜 고학생 노릇을 하였다. 무거운 가방 들고 집집마다 대문 두드리면서 들어가 ‘시골에서 태어나 서울에 올라와 서울대 3학년까지 공부하고 있는 고학생이라고 하면서 앞으로 일 년만 더 배우면 졸업하여 이 사회에 보답하겠노라’고 애원하며 호소하였더니 여러 사람들이 도와주워 돈을 많이 벌어 가게도 새로 얻어 장사를 하였다. 장사도 잘도 하며 어느 아주머니 소개로 개성에서 잘 살다가 재산은 몰수당하고 피란 나온 어느 부잣집 딸에게 서울대 3학년에 다니고 있는 학생이라 속이고 중신하며 유종구란 가짜 서울대생으로 속이고 피란 나온 어여뿐 설성김씨 김태순씨와 결혼하여 잘 살다가 군대가지 않고 기피한 죄 때문에 숨어서 살다보니 시골에서는 시골놈이 서울에 올라가 돈을 많이 벌어 큰 부잣집 아가씨하고 결혼해서 잘 살고 있다는 소문이나 고향에서 형사, 신문기자들이 돌아가면서 잡으러 오는 바람에 붙들려 가지 않으려고 돈 봉투로 막다보니 결국에는 장사를 하지 못하고 서울에서 망해 버리고 피란 나온 것이 대전으로 온 것이다.
빈 몸으로 내려온 우리 부부는 힘을 합하여 나는 연탄공장에 연탄사다가 집집마다 팔고 자전거로 장사도 했으며 각 장날을 찾아다니며 논산장, 금산장, 옥천장, 부여장 여러 장날을 다니면서 길바닥에 물건 펴놓고서 ‘싸구려’ 외쳐부르며 장사도 하였다. 우리 안식구는 학교 앞에서 조그만한 문구점을 하면서 우리 두 부부사이에 3녀1남을 두어 어려운 살림에도 애들만은 빚을 얻어서라도 학교만은 다 보내어 애들 역시 모두 다 착하고 공부를 열심히 하여 중, 고등학교, 대학, 대학원까지 다 보내였으나 큰 딸 하나만은 고등학교까지는 보냈으나 대학교는 보내지 못하고 셋은 모두 대학 졸업하였다. 둘째 딸 ooo는 충남대 나와 대학원까지 나와서 고등학교 교사로 약 25년 간 교사로 있으며 처녀의 몸으로 결혼도 않고서 있다. 셋째딸 ooo는 한남대나와서 한남대 조교로 있었으며 대전에서 대학교강사로 있었다. 막내 아들은 ooo으로 금호공대 나와서 캐나다로 유학을 갔으며 유학비를 ooo 누나가 부담하면서 두 동생들 자가용도 하나씩 다 사주었으면서 남동생 캐나다에서 돌아와 결혼할 때도 결혼비며 집 마련할 때도 일부 부담하여 형제 자매간에 우애하고 회목하며 나이 많은 아버지, 어머니 병원을 일일이 모시고 다니면서 병원 치료를 받게 하고 병원비며 약값 모두 다 부담하여 우리 가정 화목하게 이끌어가는 효녀 중에서도 효녀라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는 누가 말을 하지 않으면 효녀가 있는가, 불효자가 있는가 아무도 모른다. 그러므로 죽음을 앞두고 내가 이 사회에 알리고 싶다. 오른 손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하였으나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세상에 빛이 되라하였으니 빛을 보여줘야 어두움이 환한 세상 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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